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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이집트의 상황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자유군단이 주도한 군사쿠데타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다. 사람들은 이집트의 미래에 대해 초조하고 기대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주혁명인 문예단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초대 대통령이자 총리인 나기브와 쿠데타의 주역인 나세르와 배후에서 유력한 내무장관 나세르의 갈등.

2월 25일, 나가브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가택 연금되었고, 나세르가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지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대해 여론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전쟁 영웅인 나기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만만치 않았다. 혁명이 물거품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세르는 한 발짝 물러서서 나가브를 다시 대통령과 총리로 선출한다. 단 하루의 작살잡이 끝에 나기브는 권좌에 복귀한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나세르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져 있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나기브는 두 달도 안 돼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나세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권좌에 올라, 다음 날인 1954년 4월 18일에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가멜 압델 나세르의 천상 숙주가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집트는 우리에게 피라미드와 파라오의 나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고대 강대국과 문명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집트는 기원전 6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집트는 1922년에 독립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영향력은 허영심 많은 입헌 군주제와 민족주의 세력을 억압한 배후에 있었다. 이런 오랜 외압에 맞서 이집트뿐 아니라 아랍권 전체의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18년 1월 15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기질을 보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철저한 성찰 의식을 확립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군에 배속된 부대에서 나세르는 안와르 사다트라는 동료 장교와 만나게 되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집트의 현대사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인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과 친구라는 논리에 따라 이집트에서 높아지자 영국은 친영국 인물을 총리로 임명하기 위해 이집트 왕을 무력으로 위협했다.


이 사건으로 화가 난 젊은 장교 나세르는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의 첫걸음으로 자유군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차례로 젊은 장교들을 모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의 반성의 정서가 높아지자 영국은 1946년 수에즈 운하에 배치된 소수의 병력을 제외하고 점차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이집트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집트에서도 완전한 독립의 가능성이 높다.

1948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이 수립되자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영국군 밑에서 보조적 역할만 해 온 이집트군은 현장 경험이 부족해 연승할 수밖에 없었다. 물자뿐 아니라 전술까지 동원되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했던 나세르 소령은 무능한 군대와 정계의 고위 간부들에 대한 불만이 강하다. 단순히 민족주의의 반영이었던 그의 혁명노선이 정치사회개혁으로 바뀐 것은 이 무렵이었다.

나세르는 전쟁으로 대거 상실된 자유투사들의 병력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50대의 전쟁 영웅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에 동지로 합류한다. 자신을 포함한 자유장로교회의 대다수는 여전히 30대여서 나이 들고 인기 있는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주권자인 파루크 국왕이 사치와 퇴폐로 들끓고, 영국이 이집트에서 철수하려 할 때라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로회 소속 장교들이 나세르의 지휘를 받아 행동에 돌입한다. 쿠데타는 쉽게 성공했고, 나가이브는 즉시 전면에 나서서 민중을 이기고 초대 대통령과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온건파 나기브와 개혁파 나세르의 대립은 불가피했고, 쓰라린 권력투쟁 끝에 나세르는 물러나고 나세르는 정권을 잡는다.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가 그를 암살하려는 순간 나세르는 기회를 이용해 정적들을 숙청한다. 그리고 1956년에는 신헌법에 의한 국민투표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세르는 집권 이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하는 등 비동맹 중립 노선을 내걸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등 제3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 이집트는 동맹국으로 미국이나 소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양측을 저울질하던 나세르는 1955년 소련제 무기 도입 협정에 서명했고, 영국과 미국은 이에 반발해 나일강 아스완 댐 건설에 대한 경제적 지원 제의를 돌연 취소했다. 1956년 7월 26일 나세르는 댐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며 수에즈 운하의 기습 국유화를 선언했다. 1869년 개항한 이래 시나이 반도의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현대사에서 여러 가지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중요한 수로는 이집트의 노동력을 프랑스의 기술과 자본에 병합함으로써 완성되었으나, 이후 자금난에 직면한 이집트 정부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소유로 운하 회사의 주식을 대거 매각하였다.

아랍권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선언에 열광하고 있는데 이는 서방세계에 던지는 도전과 같다. 그러나 3개월 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수에즈 운하로 진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이 연승을 거뒀다. 다행히 국제사회의 비난을 이기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가 협상 후 물러서면서 수에즈 운하 이집트의 소유이자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이집트의 군사적 패배는 나세르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후 이스라엘과의 대결은 나세르의 정치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67년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나세르는 군대를 시나이 반도로 이동시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6월 5일 새벽 이집트 주요 비행장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전체 항공기의 90% 이상을 파괴한 눈부신 기록을 갖고 있다. 이 조항을 통제하는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로 시나이 반도를 장악한다. 제3차 중동전쟁 때 이른바 6일간의 전쟁 동안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은 이스라엘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고 있다.


충격을 받은 나세르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사퇴서를 철회했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이집트는 평소 존경받는 친서방 아랍 국가들에 손을 벌려 굴욕의 위기에 처했다. 엄청난 체면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아랍의 독불장군 역할에 계속 집중했다. 1970년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지자 카이로에서 아랍 국가 정상회의를 열고 양측의 화해를 모색했다. 9월 28일 나세르는 공항에서 각국 정상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그날 오후 6시쯤 죽는다. 정치에서 국제무대에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뜻밖이고 갑작스런 출구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카리스마 넘치는 언행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고 동정적인 최후를 맞은 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하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쉽지 않다. 오늘날 나세르는 20세기 중동의 위대한 정치인이자 범아랍주의와 이른바 나세리즘의 옹호자로 유명하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고 대통령 대신 라이스라고 불렀다. 어떻게 보면 그가 옳았다. 등장은 공화국 대통령이었지만 사실은 독재자였다. 그가 주장한 범아랍주의조차도 사실 실현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으며, 다만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58년 2월 21일 이른바 통합 아랍공화국을 결성해 나세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지만, 분쟁 3년 반 만에 해체된다. 아랍의 우방임을 자처하는 그의 행보도 아랍국가 지도자들에게 눈뜨게 했다. 아랍의 자존심을 쌓았다는 평가는 일리가 있지만 이집트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높았다.

외교에서 성공한 나세르는 국정 운영 때처럼 쓴맛을 봐야 했다. 혁명정부에 의해 서둘러 수행된 토지개혁은 가공할 부작용을 낳았고, 사회개혁은 사실상 상상할 수 없었다. 나세르 정권은 정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분의 주요 산업과 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 자본가와 반동 자본가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은행과 신문사까지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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